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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대지진, 100년전 모습은?

잡스런 2023. 8. 20. 21:34

關東大地震 | 관동대지진, 100년 전 모습

 

大正12년 그러니깐,  꼭 100년 전 1923년 9월 1일에 일본 관동지방에서는 큰 지진이 났다.

관동지방에서 일어난 큰 지진이라서 관동대지진이다. 1923년에 지진이 났으니, 올해로  딱 100년이 되는 날이다.

이미 잘 아는 바와 같이 관동대지진에서는 많은 조선인이 죽임을 당했다. 그 유명한 “15円 55錢”(쥬코엔 고쮸고센)의 발음 문제가 조선인 판단의 기준이 되었다고도 한다.

관동대지진 90년인 지난 2013년 동북아역사재단에서 개최된 학술회의에서는 조선인 학살의 수가 기존의 6,000여명이 아니라, 23,000여명을 넘는다고까지 발표(강효숙)되기도 하였다. 그러니깐 독일외무성자료(ref.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 아래 이미지)에 의하면 지역별 조선인 사망자 수를 제시하고 총 23,059명이라고 하고 있다.(1924.3)

아래의 이미지에서 9쪽부터 12쪽까지 아요야마 2, 아카야마 11 등등 지역에서 발생한 사망자 수를 기록하고 있다.

물론 1923년 당시 도쿄를 비롯한 이른바 관동지역의 재일 조선인의 숫자가 정확히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2만명을 넘는 조선인이 사망하였다는 것은 조금 더 살펴볼 필요가 있기는 하다. 자료에서 이 숫자가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에 의한 자료라고 명기되어 있을 뿐 아니라, 학술대회 때 발표자도 당시 지식인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에 의해서 확인된 숫자는 14,747명이라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아래 학술대회 보도자료 링크 참조) 그래서 2만여명을 넘는 여부는 확정할 수 없더라도 6,000여명대를 훨씬 넘는 숫자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그렇지만, 10년이나 지난 시점에서도 아직까지 공식적인 학살 피해자 수는 6,000여명대로 규정되고 있다.

 

관동대지진 지역별 사망자 수 현황(1924.3, [해외의 독립운동사사료 III, 독일외무성자료]. ref.공훈전자사료관)

 

 

당시 국제학술회의 기조강연을 하였던 故 강덕상 선생님의 발표자료에서는 일본 자경단과 학살된 조선인 시체의 참담한 사진이 공개되었는데,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물론 아직도 내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기는 하다. 그래서 더.... 

 

당시 국제학술회의 관련 보도자료는 아래 링크 참고

https://www.nahf.or.kr/gnb02/snb03.do?mode=view&page=1&cid=31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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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nahf.or.kr

 

하여간 당시 학살된 그리고 사망한 조선인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그 과정이 정확히 그리고 상세히 밝혀지지 않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오늘 올리는 이 포스팅에서는 조선인 문제 보다는 당시 일본은 이 재난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를 생각해 보려고 한다.

 

관동진재 전지역 조감도회, 吉田初三郞(오사카마이니치신문, 1924.9.15. ref.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우선 위의 사진은 지진 1년 후 그려진 당시 대표적인 조감도 작가 吉田初三郞(요시다 하츠사부로)가 그린 작품이다. 동경지역을 비롯하여 인근의 요코하마 등지가 지진으로 큰 화염에 휩싸여있는 모습이다.

당시 지진의 모습을 경험한 작가의 그림이라서, 이른바 현장감 있는 그림이라 할 수 있다.

 

히비야 공원 인근 무라노우치의 불타는 경시청 모습, 1923.10.1발행([관동진재화보] 제1권, 오사카마이니치신문. ref.국립중앙도서관)

吉田初三郞의 조감도 보다 더 실상을 사실대로 전하는 사진은 위의 사진이다. 관동대지진이 1923.9.1인데, 이 화보집은 9.25 인쇄를 하여 10.1 발행한 것으로, 당시 관동대지진을 기록한 화보집 중에 단연 빠른 화보집이다.

지진이 있던 당시 재난 현장을 사진으로 남겼다가, 어느정도 안정화되어 가는 와중에 사진집(총 2권)으로 간행한 것으로 생각된다.

위의 경시청을 비롯하여 무너진 건축물들, 재난에 집을 잃은 이재민들의 사진들이 고스란히 전한다.

 

오사카축항으로 피난을 가는 모습. 1923.10.1발행([관동진재화보] 제1권, 오사카마이니치신문. ref.국립중앙도서관)

 

위의 사진은 9월 6일 오전 요코하마역에서 오사카로 가는 "런던丸"에 오르는 피난민들의 모습이다. 재난 지역에서 발생된 이재민들을 우선 안전지역이라 생각되는 관서(간사이)지역으로 이동시키는 모습이다.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이 몇십만명이 발생한 상황에서 이들의 안정을 위한 안전한 지역으로 옮기는 모습이다.

 

그리고 같이 나오는 사진은 계엄령이 선포된 후 계엄사령부의 모습과 계엄령에 대한 관보 사진도 있다. 그렇지만, 이후 서둘러 진행되는 복구작업의 모습이다.

공병대가 철교와 다리 복구공사를 하는 모습. 1923.10.1발행([관동진재화보] 제2권, 오사카마이니치신문. ref.국립중앙도서관)

 

그런데 이러한 계엄령 선포, 난민의 이동과 안정화, 복구공사의 진행에 앞서 나오는 사진은 아래와 같다.

피해지역을 시찰하는 히로히토 섭정궁(니혼바시). 1923.10.1발행([관동진재화보] 제2권, 오사카마이니치신문. ref.국립중앙도서관)
피해지역을 시찰하는 히로히토 섭정궁(오에노공원, 9.15). 1923.10.8발행(관동대진재사진실기, [婦女界]28-4, 동경, 부녀계사. ref.국립중앙도서관)

 

위의 두 사진은 히로히토 당시 섭정(히로히토)이 말을 타고 우에노공원을 방문하는데, 니혼바시를 지나는 장면이다. 사실 이 두사진 모두 오사카마이니치신문사에서 발행한 화보집에 실려있으며, 또한 [婦女界]라는 잡지의 관동대진재사진실기에는 우에노공원의 사진만 게재되어 있다. 두 사진집은 발행일이 10.1과 10.8로 동일한 사진이 사용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또한 동시대성을 갖는 사진이다.

 

天覽과 台覽이 강조된 관동대진재사진실기, [婦女界]28-4의 목차(1923.10.8발행, 동경, 부녀계사. ref.국립중앙도서관)

 

[부녀계] 목차에 자랑스럽게 게재된 '천람'과 '태람'이라는 이름, 그러니깐 '천람' 즉 천황이 열람하고, '태람' 즉 섭정이 열람하였다는 영광을 자랑스럽게 표시하고 있다. 게다가 '목하' 전국 각지를 순회하며 공개전시 중인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정리하면 이러한 사진집들의 간행은 재난의 실상을 알림과 동시에 섭정궁(히로히토)의 영도력을 중심으로, 재난을 당한 사람들에 대한 대우 그리고 복구작업을 통해서 빨리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음을 알리려 하는 것 같다.([관동진재화보]에서는 히비야공원에서 진행 중인 임시학교의 수업 모습도 있다.)

즉 '관동대지진'에 대해서 조선인 학살과 같은 부정적인 사실 보다는 '복구', '부흥'(復興帝都)'과 '극복'을 통해 만주국 설립과 세계대전을 일으키는 강력한 국력을 과시하려는 모습으로도 읽힌다.([부녀계]에서는 많은 사연을 기사로 싣고 있음에도, 자경단, 조선인 등의 글자는 보이지 않는다)

 

동일본대지진 이후, 일본은 '관동대지진의 극복' 그리고 '찬란한' 발전을 지향하는 '복구', '부흥', '부흥제도'를 넘어 '부흥일본'을 지속적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 

어쩌면 후쿠시마 오염수 문제 역시 부흥과 복구를 이야기 하는 것인데, 이런 지진의 트라우마를 넘어서야, 제국과 만주를 경영하는 대동아공영의 영광을 재연할 수 있는 길로 들어설 수 있다고 판단하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애니메이션 '바람이 분다'에서도 지진을 넘어서고, '스즈메의 문단속'에서도 지진을 관리.극복하고자 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지브리 영화 '바람의 분다'의 관동대지진 장면
9.1. 오후2시 경, 淺草(아사쿠사)부근.  1923.10.8발행(관동대진재사진실기, [婦女界]28-4, 동경, 부녀계사. ref.국립중앙도서관)

 

[婦女界]에 게재된....

경시청 자료를 인용한 통계에 따르면...

동경지역 소실된 戶는 316,088호, 이재민 1,356,741명이다.

육지측량부에 의한 자료에 따르면, 전면적 5.1439 대비 소실면적 2.2475(단위는 정확히 모르겠음)로 소실률 44%라고 한다.

 

임시구제사업국 사망자 통계 : 합계 97,288인

東京 : 남 16,682인, 여 16,625인, 남녀불명 39,294인, 총 72,601인

神奈川縣 : 23,767인

靜岡縣 : 282인

千葉縣 : 435인

埼玉縣 : 203인

※기타지역은 확인 안됨

 

2023.8.20. HiSTO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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