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s러운
100년 전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수용시설(가나가와현) 본문
100년 전 관동대지진 당시 가나가와현 조선인 수용시설
관동대지진 100년을 맞아, 당시 일본에서는 그 재난을 어떻게 기록하였느냐를 찾아보고 있다.
물론 故 강덕상 선생님이 수집한 조선인학살과 자경단의 사진들에서 그 실상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지만,
일본인 그들이 공식적으로 남긴, 그러니깐 책의 형태
로 출간한 사진집 화보집을 통해서 어떻게 기록되고 있는지도 관건이다.
1923~25년까지 나온 관동대지진 관련 여러 화보를 들여다 보고 있는 와중에,
'조선인'이 사진으로 묘사된 것은 딱 하나이다.
위 사진은 일본 가나가와(神來川)현에서 1925.5.5 간행한 『대정12년 9월 1일 대진재기념사진첩』(桝井照蔵, 神來川縣사진첩반포사무소)에 실린 사진이다.
타지마(田島)町의 어느 신사 안에 보호(?)되고 있는 조선인의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이다.
사진 아래에 적힌 주기를 읽어보면, 아래와 같은 몇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1. 관동대지진 당시 유언비어가 횡횡함
2. 유언비어가 지목하고 있는 사람들은 조선인
3. 조선인이 피해를 많이 봄
4. 가나가와현 타지마쵸에는 조선인을 수용한 사실 있음
5. 가나가와현에서는 이를 공으로 인정하고 있음
그러니깐 잘 알고 있는 "15円 55錢”(쥬코엔 고쮸고센)"은 조선인을 구분하기 위한 수단이었고, 그러한 구분이 필요한 이유는 당시 만연한 유언비어 때문이었다.
이러한 유언비어를 비롯한 여러가지 이유로 당시의 지진 피해지역에는 계엄이 선포되었는데....
이러한 계엄 하에서도 조선인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은 줄어들지 않았고, 그래서 인지 가나가와현에서는 조선인을 '보호'하려고 별도의 시설을 갖추어 수용하였다. 하지만 조선인을 '보호'한다는 것 보다는, 그들의 입장에서 조선인이 불법을 행하지 못하도록 조치한 것일테다. 그래서 조선인 수용은 '보호'가 아니라 '감금' 혹은 '연금'일 것이다.
수용된 조선인의 사진을 보면,
다 쓰러져가는 판자집 이른바 하꼬방에서
아이를 업은 치마저고리를 입은 여인네 한명과 멀리서 사진찍는 사람을 바라 보는 여인 한명이 나온다.
일본인들은 한두명의 조선인을 놓고, 여러명이 촬영을 하며,
조선인이 행할 위해를 사전에 예방하고 있다고 자랑스레 기념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위험한' 조선인에 대해서 사전에 조치를 취하고 있고, 이를 공으로 인정받기 위한 기록을 남겨야 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물론 조선인이 등장하는 사진을 포함한 『대정12년 9월 1일 대진재기념사진첩』(1925.5.5)의 발행목적은 '복구'와 '부흥 : 復興帝都(부흥제도)'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조선인 수용을 통한 안정조치는 복구를 앞당기는 일이라는 의미로 이러한 사진을 사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감금'과 '연금'이라는 수용형태가 '보호'로 인식되는 인권의식은 저 멀리에 두고,
또한 학살이라는 반인류적 만행은 언급도 안하면서,
'복구'와 '부흥'만 부르짓는 모습은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아니다. 동일본대지진 이후 일본에서 줄곧 부르짓었던 "부흥일본"은 관동대지진 당시의 '부흥제도'를 이어받은 거다.
2023.8.29 HiSTO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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